오늘도 하루를 살아내고..
저녁 7시 반, 현관문이 열린다.
\"나 왔어.\"
대답이 없다.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편은 넥타이를 풀면서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 하나를 꺼내 식탁에 앉는다.
아무도 \'오늘 어땠어?\'라고 묻지 않는다.
아무도 \'밥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결혼 23년 차, 박 부장 가정의 평범한 화요일 저녁이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는지, 박 부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자녀 대학 입시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대화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버지라는 역할의 소멸
한국의 50대 남성에게 가정이란 오랫동안 \'책임\'의 공간이었다.
아파트 대출 원리금 매달 220만 원. 아이 둘 학원비 합산 월 150만 원. 명절 양가 용돈 각 30만 원.
그는 이 숫자들을 20년 넘게 머릿속에 달고 살았다. 돈이 부족하면 야근을 했고, 야근이 부족하면 주말 출근을 했다.
가족을 먹여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이었고, 그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 곧 사랑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거나, 같이 놀아주거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그 역할표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들어오고,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나갔으니까.
그렇게 20년을 살았더니, 어느 날 아이들이 다 컸다.
큰애는 취업해서 따로 살고, 작은애는 기숙사 생활을 한다. 카톡으로 가끔 용돈을 보내면 \'감사합니다\'가 온다.
전화를 걸면 \'아빠 나 바쁜데, 무슨 일이야?\'가 온다.
수십 년간 \'아버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온 남자에게, 그 역할의 종료는 예상보다 훨씬 크게 작동한다.
마치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된 것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공허함이 남는다.
부부라는 이름의 평행선
자녀가 독립하고 나면, 이번엔 부부 사이의 거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0~30대에는 바빠서 몰랐다. 아이 키우고, 집 장만하고, 각자의 직장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삶이 꽉 찼다.
대화가 없어도 공통의 미션이 관계를 이어붙여 줬다.
그런데 그 미션이 완료되고 나니, 비로소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는지가 보인다.
아내는 그 20년 동안 조용히 자기 삶을 구축했다. 남편이 야근하는 저녁에 동네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남편이 골프를 치는 주말에 문화센터를 다녔다. 독서 모임도 생겼고, 여행 친구들도 생겼다.
이제 아내의 일정은 남편 없이도 빼곡하다. 심지어 더 활기차다.
반면 남편의 퇴근 이후 시간표는 텅 비어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이 줄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모임도 뜸해졌다.
집에 오면 할 것이 없다.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일찍 잠드는 것뿐이다.
아내는 그 옆에 있지만, 이미 서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가장 낯선 사람이 됐다. 이 아이러니를 이 남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가끔 밤에 혼자 맥주를 마실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 이게 맞나? 다들 이렇게 살아 가나? 나 잘살아 온 건가?
대화가 사라진 자리
부부 상담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관계가 식는 건 싸움 때문이 아니라, 대화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대부분 50대 이상 부부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대화도 거의 없다.
나누는 말이라고는 \'밥 먹었어?\', \'애 연락 왔어?\', \'다음 주 처가 가야 해\' 같은 사무적인 것들 뿐 이다.
감정을 나누거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서로의 고민을 묻는 것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처음엔 피곤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엔 익숙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가 할 말이 없는 건지, 할 말이 있는데 안 하는 건지,
아니면 할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건지.
남편이 \'나 요즘 좀 힘들어\'라고 말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관계. 그것이 23년 차 부부의 현실이다.
하긴 나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왠지 그런 말 은 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환영받고 싶다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 \'소속감\'과 \'인정 욕구\'가 있다.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각,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감각.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서서히 무너진다.
50대 남편들이 집에서 잃어버린 것은 정확히 이것이다.
오늘 힘든 일이 있었는데,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다. 무언가 잘해냈는데,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
그냥 거기 있는 것 만으로 반겨지는 느낌이 없다. 가족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 남자는 점점 배경이 되어간다.
그 결핍이 오래 쌓이면, 사람은 그 감각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된다.
그것이 건강한 방식이든 그렇지 않은 방식이든 간에. 그런데 필리핀의 밤 거리는 그 결핍에 정확하게 응답하는 공간이다.
환대가 있고, 관심이 있고, 자신이 거기 있어도 된다는 신호가 있다. 그것이 설령 돈으로 구매 된 환경일지라도,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었던 남자에게는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어떤 남자들에게 집은 오히려 가장 외로운 공간이 된다. 같은 지붕 아래 있지만, 철저히 혼자인 느낌.
집안 정리를 하고 재활용 하고 쇼파에 기대고 보니 아이들은 방문은 닫혀있고, 아내는 티비를 보고 있다.
아무도 난 봐주지 않는다. 이게 외로움 이라는 감정인가?..
그 외로움이 매일 밤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결국
어느 금요일 저녁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게 만든다. 이 남자 잘못된 걸까?
그 남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그 거실의 소파를 한번 떠올려보길 바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 다른 화면을 보고 있는 그 장면을.
다음편에서....

댓글 1
조건 체크할 때 도움 되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