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한 지 다섯 달째 되던 날 밤,
최ㅇㅇ은 38.9도의 열이 났다.
덥고 습한 나라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아팠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머리가 아팠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체온계를 재보니 숫자가 낯설게 높았다.
한국이었다면 일단 어머니한테 전화하고,
근처 내과에 걸어가고, 타이레놀 받아서 집에 오면 됐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는 시차가 한 시간이지만 새벽 두 시였다.
근처 내과가 어딘지 몰랐다.
필리핀 병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열이 높아서 찾아보는데 글자가 흔들렸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이국땅에서 혼자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병원에 간다는 것
필리핀의 병원은 한국과 다르다.
사립 병원과 공립 병원의 격차가 크다.
사립 병원은 시설이 좋지만 비싸고, 공립 병원은 저렴하지만
대기 시간이 길고 시설이 열악하다.
외국인이 갈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지는 대부분 사립 병원이다.
처음 가면 낯선 것들이 많다.
접수할 때 필요한 서류, 보험 확인 절차, 의사와의 대화 방식.
한국처럼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시스템이 아닌 경우도 많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그냥 서 있게 된다.
최ㅇㅇ은 그날 밤 결국 한인 카페에 글을 올렸다.
38.9도 열이 나는데 어떤 병원 가야 하냐고. 새벽임에도 댓글이 달렸다.
주변 병원 이름, 택시 잡는 방법, 가서 뭐라고 해야 하는지까지.
그 댓글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아플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이국땅에서 아프면,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보인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약국.
새벽에도 열려 있는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해열제.
아프다고 하면 죽 끓여주던 어머니.
진료비 걱정 없이 쓸 수 있는 건강보험.
의사한테 한국말로 증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
그것들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없어보고 나서야 안다.
동시에, 아픈 순간에 뜻밖의 온기를 경험하기도 한다.
아떼가 죽을 쑤어준다. 이웃이 과일을 사다 준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모르는 사람이 병원까지 데려다준다.
외롭고 힘들어야 할 순간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로부터 따뜻함을 받는다.
아프고 나서 필리핀에 뿌리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힘든 순간을 함께 버텨준 사람들이,
평생 잊히지 않는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몸 관리의 현실
필리핀에서 건강을 지키는 것은 한국과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열대 기후 특성상 뎅기열, 장티푸스, 식중독에
노출될 가능성이 한국보다 높다.
물은 반드시 생수를 마셔야 하고,
길거리 음식은 위생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모기 기피제는 생활필수품이다.
에어컨을 너무 오래 틀면 감기에 걸리기 쉽고,
너무 안 틀면 더위를 먹는다.
오래 산 사람들은 자기만의 건강 루틴이 생긴다.
단골 병원을 정해두고, 신뢰할 수 있는 약국을 알아두고,
기본 상비약을 항상 구비해두는 것.
그 루틴이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만들어지고 나면 훨씬 안심이 된다.
몸 하나 챙기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하는 나라.
그것이 이주 생활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적응하면서,
사람은 조금 더 단단해진다.
어느날 새로 이주해온 한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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