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산 지 4년이 된 이수진에게 누군가 물었다.
\"거기서 살면 어때요? 좋아요?\"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좋다고만 하기엔 정전이 떠오르고, 비자 갱신이 떠오르고, .
처음 아팠던 날 밤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힘들다고만 하기엔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이렇게 대답했다.
\"복잡해요. 근데 여기 있고 싶어요.\"
후회하는 날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필리핀 이주 생활에
후회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비자 때문에 반나절을 날린 날, 후회했다.
아이가 아픈데 데려갈 병원을 몰라서 당황했던 날, 후회했다.
한국에서 먹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여기서는 구할 수 없던 날, 후회했다.
부모님이 갑자기 보고 싶어진 새벽, 후회했다.
그 후회들이 쌓이면 가끔 진지하게 생각한다.
돌아가야 하나. 한국이 맞는 건가?.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런데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 창문 밖을 보면
야자수가 있다. 저녁 노을이 진다.
아뗴 마리아가 밥이 됐다고 부른다.
이웃집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또, 괜찮아진다.
여기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
4년을 살면서 이수진이 얻은 것들이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
정전이 와도, 단수가 와도, 계획이 틀어져도 —
어떻게든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돼야 했는데,
여기서는 계획이 바뀌는 것이 계획이 됐다.
작은 것에서 만족을 찾는 능력.
수영장에 혼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아침.
아떼가 만들어준 생소한 필리핀 음식을
처음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웃이 담벼락 너머로 과일을 건네주는 오후.
그런 것들이 하루를 충분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
직함도 스펙도 없이, 그냥 어떤 사람인지로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처음엔 낯설었는데, 이제는 그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
같은 이유로 모인 사람들
필리핀 한인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사업을 하러 온 사람, 은퇴 후 여유를 찾아온 사람,
아이 교육 때문에 온 사람, 한국이 지쳐서 도망쳐온 사람,
사랑을 따라온 사람. 이유는 다 다르다.
그런데 함께 비자 줄을 서고, 함께 정전을 버티고,
함께 한인 마트에서 신라면을 집어들고,
함께 이국땅에서 아파보고 — 그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상한 동질감이 생긴다.
한국에서는 전혀 접점이 없었을 사람들인데,
여기서는 그냥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 된다.
그 커뮤니티가 때로는 불편하고, 좁고,
소문이 빠르고, 피곤하기도 하다.
그러나 힘든 날에 가장 먼저 연락하게 되는 것도,
결국 그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를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이미 필리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 글에 나온 것들을 다 겪어본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겪은 것들이 다 의미가 있었다고.
정전도, 비자 반려도, 낯선 병원의 새벽도.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아직 필리핀 이주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겪고 나서,
어느 날 저녁 테라스에 앉아 노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도 여기 있길 잘했다.
그 순간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난 필리핀이 좋다....
「필리핀에서 한국인으로 살면 생기는 일들」 — 完
이제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올립니다.
현재 필리핀에 거주하시는 모든 여러분들 항상 응원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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