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헬퍼를 들였던 날,
박ㅇㅇ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필리핀에서 가정에서 일하는 도우미를
공식적으로는 카삼바하이(Kasambahay) 라고 부른다.
타갈로그어로 \'집(bahay)과 함께하는 사람(kasama)\'이라는 뜻이다.
법적으로도 보호받는 엄연한 직업군이고,
2013년부터는 카삼바하이 법(Kasambahay Law)까지 생겨
고용계약서 작성과 3대 보험 가입이 의무화됐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한국인들이 헬퍼를 부를 때는
대부분 아떼(Ate) 라고 한다.
아떼는 원래 필리핀어로 \'언니\' 혹은 \'나이 많은 여성에 대한 존칭\'을 뜻한다.
나이 차이에 따라 언니가 되기도 하고 아줌마가 되기도 하는,
상대를 존중하는 호칭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용 관계에서 쓰는 공식 호칭은 아니다.
그러나 필리핀에 사는 한국인 가정에서는 워낙 자연스럽게 굳어진 말이라,
\"아떼 왔어요?\", \"아떼한테 부탁해\" 같은 말이 일상어가 됐다.
박ㅇㅇ이 처음 구한 아떼는 마리아, 42살, 레이테 섬 출신이었다.
소개소를 통해 연결됐고, 월급 협상을 마치고 짐을 들고 나타난 그날,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게 웃었다. 박혜원은 영어로 말했다.
마리아는 세비사노 억양이 강한 영어로 대답했다.
절반쯤 알아들었다. 어색한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어디까지 시켜야 하는가
아떼를 처음 들이는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혼란이 있다.
어디까지 부탁해야 하는가이다.
청소는 당연히 되는 것 같고, 빨래도 되는 것 같고,
요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말 안 해도 알아서 하는 건지,
일일이 말해야 하는 건지. 너무 많이 시키면 미안하고,
너무 적게 시키면 뭘 하러 있나 싶다.
한국에서는 집에 남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선 문화다.
가정부를 둔다는 것이 특별한 계층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나라에서 살다 왔으니, 그 관계 설정이 어색한 게 당연하다.
박ㅇㅇ은 처음 두 달 동안 마리아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다
\"미안하지만\", \"괜찮으면\"을 붙였다. 마리아는 그때마다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과들이 마리아를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을 하러 왔는데 고용주가 매번 미안해하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싶어진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아떼와의 관계는 명확한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편하다.
할 일을 분명히 정하고, 규칙을 세우고, 그 안에서 서로 존중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또 한 가지. 아떼가 나이가 많든 적든,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마리아라면 \"마리아\", 조이라면 \"조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하는 방식이다.
물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이름 부르기가 어색할 때는 아떼라고 부르면 된다.
다만 아떼라는 말이 \'언니\'이기도 하고 \'아줌마\'이기도 한 만큼,
상대의 나이를 가늠하고 쓰는 센스가 필요하다.
스물 살 헬퍼에게 아떼라고 불렀다가 아줌마 소리 들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언어의 벽 너머
마리아는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세비사노를 썼다.
박ㅇㅇ은 세비사노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초반엔 모든 소통이
영어로 이루어졌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뭔가가 어긋났다.
박ㅇㅇ이 \"청소기 돌려줘\"라고 했을 때 마리아가 걸레로 닦은 것도,
그것이 언어의 문제인지 이해의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박ㅇㅇ이 구글 번역기를 켜서 세비사노로 말을 걸었다.
발음이 이상했는지 마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박혜원도 같이 웃었다. 그게 전환점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서툴게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박혜원은 세비사노 단어를 몇 개씩 배웠고, 마리아는 한국어 단어를 몇 개씩 외웠다.
\"오빠요\" \"감사합니다\" \"맛있다\" —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서투름이 오히려 관계를 가깝게 만들었다.
카삼바하이 법이 있다는 것
필리핀에서 아떼를 고용할 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2013년부터 시행된 카삼바하이 법에 따라 고용주는
아떼와 반드시 고용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SSS, 필헬스, 팍이비그
3대 보험에 가입시켜줘야 한다. 최저 임금 기준도 지역마다 다르게 정해져 있다.
처음 알게 됐을 때 번거롭다고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런데 이 법이 생긴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떼들도 엄연히 일하는 사람이고,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좋은 고용주의 시작이고,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실제로 계약서를 쓰고 보험을 제대로 챙겨주는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아떼들이 훨씬 오래 일한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충성심이 생기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가족이 되는 일
마리아가 온 지 8개월째 되던 날, 박ㅇㅇ의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났다.
밤 12시였다. 박ㅇㅇ의 남편은 출장 중이었다.
혼자 아이를 안고 병원을 가야 하는데, 그랩은 잡히지 않았고,
어디 병원을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마리아가 방에서 나왔다. 자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온 것이었다.
상황을 보더니 마리아가 말했다. \"나 알아요 병원. 같이 가요.\"
그리고 직접 아는 드라이버에게 전화를 해서 차를 불렀다.
병원에서는 통역도 해줬다. 새벽 두 시에 집에 돌아와서,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리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박ㅇㅇ은 마리아에게 진짜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마리아는 \"별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별거 아닌 것이,
그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떼와 나. 처음엔 고용주와 피고용인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경계가 흐려진다. 법으로 정해진 관계에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법 바깥의 무언가가 생긴다.
필리핀에 살면서 가장 예상치 못했던, 그리고 가장 소중한 관계가 되는 경험.
아떼 아줌마와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진다.
필리핀은 정겨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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