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비자 갱신의 날

정착이야기

2부. 비자 갱신의 날

2부. 비자 갱신의 날

필리핀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공통의 적이 있다.

비자다.

정확히는 비자 갱신이다. 관광비자로 들어온 경우 

30일마다, 혹은 59일마다 갱신을 해야 한다. 

장기 비자를 가진 경우에도 크고 작은 서류 갱신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 필리핀에 사는 외국인은 

정기적으로 이민국(BI, Bureau of Immigration)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한 번 해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지 못한다.




BI 오피스 앞의 아침


마닐라 이노바센트로에 있는 이민국 본청. 

오전 8시에 문이 열린다.

그런데 7시에 이미 줄이 길다. 

외국인들이 번호표를 들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 

유럽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국적은 달라도 

표정은 비슷하다. 

지쳐 있거나, 지루하거나, 살짝 불안하거나.

처음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해서 간다. 

체크리스트를 세 번 확인하고, 복사본도 넉넉하게 챙기고. 

그런데 창구에 앉으면 예상치 못한 말을 듣는다.


\"This photo is too old.\"
\"You need one more copy.\"
\"This form is the old version.\"


사진이 너무 오래됐다. 복사본이 한 장 더 필요하다. 

그 양식은 구버전이다. 이유는 매번 다르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오늘은 안 된다.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의 기분을,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서류 하나의 무게


김동현은 SRRV 비자를 신청하면서 세 번 반려를 당했다.

첫 번째는 사진 규격이 맞지 않았다. 규격을 다시 확인하고 

재촬영해서 갔더니, 두 번째는 은행 잔고 증명서의 날짜가 

30일을 초과했다고 했다. 새로 발급받아서 갔더니, 

세 번째는 공증이 필요한 서류 하나가 빠져 있었다.


세 번째 반려를 당하는 날, 

그는 BI 건물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오전 11시였다. 그냥 마시고 싶었다.

옆에 앉아 있던 50대 독일 남자가 말했다. 

\"비자 문제예요?\" 그렇다고 했더니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섯 번 왔어요.\" 그 말이 왜인지 위로가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필리핀 비자의 세계에서, 반려는 실패가 아니다. 

그냥 과정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비자 에이전트라는 존재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대부분의 이주 한국인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에이전트를 쓴다.

비자 관련 서류를 대행해주는 에이전트들이 있다. 

비용이 들지만, 그 비용이 아깝지 않다는 것을 

직접 BI를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시간을, 에너지를, 멘탈을 지킬 수 있다면 돈은 아깝지 않다.

좋은 에이전트를 찾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다. 

필리핀 한인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으로 퍼지는 에이전트들이 있고, 

오래 산 선배 이주자들에게 추천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한인 카페나 단톡방에서 \"비자 에이전트 추천해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이 쏟아지는 이유가 있다.




갱신일이 주는 묘한 연대감


그런데 비자 갱신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부산물이 있다.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BI 앞 줄에서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얼마나 됐어요, 어디 사세요, 

비자는 무슨 종류예요. 그 대화들이 쌓여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정보를 얻기도 하고, 심지어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필리핀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말한다. 비자 갱신은 귀찮지만, 

그날 만난 사람들이 인연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공통의 고통이 사람을 빠르게 친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달, 매년 돌아오는 그 날. 필리핀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날. 비자 갱신의 날은 

그렇게 필리핀 이주 생활의 일부가 된다.


1년이 참 빨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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