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을 떠나기 전날 밤, 이ㅇㅇ은 유튜브를 세 시간 동안 봤다.
필리핀 이주 브이로그. 세부 한 달 살기 후기.
마닐라 콘도 투어. 영상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영장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열고,
저렴한 가격에 넓은 집을 소개했다.
댓글에는 \"부럽다\", \"저도 가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가 가득했다.
이ㅇㅇ은 그 영상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겠다.
그리고 한 달 뒤, 세부의 콘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왜 아무도 이런 이야기는 안 했지?
첫 번째 정전
필리핀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불이 꺼졌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에어컨도 꺼졌다.
선풍기도 꺼졌다. 냉장고도 꺼졌다. 핸드폰 충전기도 꺼졌다.
밖을 내다보니 건물 전체가 캄캄했다.
아파트 복도도, 수영장 조명도, 경비 부스의 불도.
한국에서는 정전이 거의 없다.
살면서 경험한 정전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처음엔 무언가 심각한 일이 생긴 줄 알았다.
관리실에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안 받았다.
이웃집 문을 두드렸더니 현지인 아저씨가 나와서 웃으며 말했다.
\"Brown out. Normal.\"
그러고는 문을 닫았다. 노멀. 이게 노멀이라고?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핸드폰 손전등에 의지해
한 시간을 버텼다. 전기가 다시 들어왔을 때,
이ㅇㅇ은 처음으로 에어컨 바람에 감사함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사함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보조배터리를 두 개 장만했다.
양초도 샀다. 그리고 정전이 올 때마다 조금씩
덜 당황하게 됐다. 필리핀 생활의 첫 번째 적응이었다.
영어가 통하는데 왜 못 알아듣지
필리핀은 영어가 공용어다.
그 사실이 이주를 결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영어권이니까 의사소통이 될 것이라고.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 첫 번째 벽을 만났다. .
필리핀 영어는 한국 사람들이 학교에서 배운 영어와 달랐다.
억양이 달랐다. 단어를 강조하는 위치가 달랐다.
빠르게 말하면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
분명히 영어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황이
하루에 수십 번 생겼다.
마트에서 직원이 뭔가를 물어봤다.
네 번을 다시 말해달라고 했는데도 못 알아들었다.
결국 직원이 종이에 써줬다. \"Do you have a loyalty card?\"
로열티 카드가 있냐는 말이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
귀가 아직 안 열린 거였다.
그 귀가 열리는 데 대략 두 달이 걸렸다.
두 달 동안은 모든 대화가 30% 정도는 추측으로 이루어졌다.
단수는 예고 없이 온다
정전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이 있었다. 단수였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려는데 물이 안 나왔다.
수도꼭지를 돌려도 실 같은 물줄기만 나왔다.
아파트 단톡방에 물어봤더니 현지인 이웃이 답장을 보냈다.
\"Water interruption. Maybe 4 hours, maybe all day. Not sure.\"
올 데이. 하루 종일 물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한국에서는 단수 공지가 일주일 전에 문자로 왔다.
날짜, 시간, 예상 종료 시각까지 정확하게.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공지가 없다. 그냥 안 나온다.
언제 다시 나올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이수진은 욕실에 큰 양동이를 하나 뒀다.
물이 나올 때 채워두는 용도였다.
필리핀 살림의 필수품이 양동이라는 것을,
유튜브 브이로그에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교통체증이라는 이름의 시간 도둑
세부에서 마닐라로 한 번 출장을 갔다.
약속 시간은 오후 2시. 호텔에서 목적지까지 거리를 검색했더니
11킬로미터가 나왔다. 한국이라면 30분이면 충분한 거리.
그래서 1시간 전에 출발했다.
2시간 20분이 걸렸다.
11킬로미터를 2시간 20분.
중간에 에어컨도 없는 지프니를 두 번 갈아탔고,
그랩이 길 중간에서 갑자기 취소됐고,
오토바이 택시(트라이 서클)를 처음으로 타봤다.
약속 시간에 40분 늦었다. 상대방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That\'s Manila traffic. Normal.\"
또 노멀 이었다. 이 나라에서 노멀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면
처음 한 달은 솔직히 힘들었다.
정전, 단수, 교통체증, 못 알아듣는 영어, 예측 불가능한 모든 것들.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몇 번은 진짜 짐 싸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적응이 된 것이다. 정전이 와도 양초를 켜고 책을 읽으면 됐다.
단수가 오면 양동이 물로 버티면 됐다.
교통체증이 있으면 30분 더 일찍 나가면 됐다.
영어는 그냥 못 알아들으면 다시 물어보면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상하게 삶이 단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는 것을 포기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돼야 했다.
배달이 10분 늦으면 짜증이 났고, 지하철이 2분 지연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두 달을 살다 보니,
그런 것들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 일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을 직접 겪으면서,
이ㅇㅇ은 조금씩 필리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는 필리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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