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7년을 산 박ㅇㅇ은 매년 두 번 한국에 간다.
설날과 추석. 비행기에서 내려 인천공항을 걸을 때마다
드는 감각이 있다. 아, 한국이다. 낯설지 않다.
그런데 집 같지도 않다.
반대로 필리핀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있다.
마닐라 공항을 나서면서 드는 그 후텁지근한 공기, 시끄러운 소리들,
택시 기사의 웃음. 아, 왔다. 그런데 이것도 완전한 집은 아니다.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디가 집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이제 괜찮다.
정체성의 혼란
두 나라 사이에 오래 서 있다 보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온다.
나는 한국 사람인가, 필리핀에 사는 한국 사람인가,
아니면 그 경계 어딘가의 사람인가. 한국에 있을 때는
필리핀에서의 삶을 설명하기 어렵고, 필리핀에 있을 때는
한국에서의 나를 설명하기 어렵다.
두 곳 모두에서,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
그 혼란이 초반에는 꽤 힘들다. 나는 도대체 어느 쪽인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불안. 뿌리가 없어지는 느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혼란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두 가지를 가진 사람
어느 나라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은 두 곳 모두를 가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서가 있고, 필리핀의 여유가 있다.
한국의 성실함이 있고, 필리핀의 낙천성이 있다.
빠른 것의 장점을 알고, 느린 것의 가치도 안다.
경쟁의 세계를 살아봤고, 충분함의 감각도 배웠다.
그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처음엔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가능했다.
아니,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풍부한 것이었다.
하나의 시선만 가진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두 시선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다.
그 자리가 불안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넓은 자리다.
집이란 무엇인가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결국 하나의 질문로 돌아온다.
집이란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곳인가. 가족이 있는 곳인가.
가장 편안한 곳인가.
아니면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곳인가.
필리핀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집이 하나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워하는 곳이 두 개여도 되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두 개여도 된다.
어디에 살든 완전한 집이 아닌 것 같은 그 감각이,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사랑하게 된 증거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를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이미
필리핀에 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필리핀을
여러 번 다녀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으로 이 말을 건네고 싶다.
떠나는 것이 도피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른 곳에서 살아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돌아온 자리를 조금 다르게 만든다.
필리핀은 그 경험을 유독 강렬하게 만드는 나라다.
왜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냥, 한번 빠지면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찾으러, 오늘도 인천공항에서 누군가가(나 일 수도)
세부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필리핀을 떠나지 못하는가」 — 完
다음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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