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그래도 한국이 그리운 순간들

정착이야기

5부. 그래도 한국이 그리운 순간들

— 떠나온 사람만이 아는 감정 —

오랫만에 이어가 본다.


필리핀에 산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김ㅇㅇ은 편의점에서 멈췄다.

라면 코너 앞이었다. 필리핀 편의점에도 라면은 있다. 

그런데 그 라면들이 낯선 브랜드들뿐이었다. 

신라면이 없었다. 진라면도, 너구리도 없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울컥했다. 라면 하나 때문에. 

37살 남자가, 낯선 나라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그날 밤 그는 한인 마트까지 차를 몰고 가서 신라면 한 박스를 사왔다. 

1개에 2,000원짜리 라면을 박스로. 그것을 혼자 끓여먹으면서, 

처음으로 진짜 그리움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필리핀 음식은 나쁘지 않다.

아도보, 시니강, 레촌. 익숙해지면 맛있다. 그런데 사람의 혀에는 

고향이 있다. 오래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삼겹살이 먹고 싶다.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다. 그 음식들이 생각날 때의 

그리움은, 단순히 특정 맛이 먹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음식과 함께였던 시간들이, 사람들이 그리운 것이다.


필리핀의 한인 식당에 가면 그래서 이상한 풍경이 펼쳐진다. 

음식 맛이 한국 그대로가 아닌데, 다들 맛있다고 먹는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먹고 싶은 건 된장찌개가 아니라, 

한국에 있을 때의 그 느낌이니까.




계절이 그리울 때


필리핀에는 사계절이 없다.

건기와 우기, 두 계절뿐이다. 처음엔 그것이 좋았다. 

겨울 없이 따뜻한 것이 좋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 한국의 계절들이 그리워진다.


10월의 단풍. 12월의 첫눈. 3월 벚꽃이 피는 거리. 

한여름 장마가 시작될 때의 그 냄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삶이 새로워지는 감각. 그것이 없는 곳에서 몇 년을 살다 보면, 

한국의 계절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필리핀에서 12월을 맞이하는 한국 사람들이 유독 향수를 많이 탄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오는 쇼핑몰 안에서, 반팔을 입고 걸으면서, 

눈 내리는 서울 거리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족이 그리울 때


그리움의 가장 깊은 층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부모님. 처음엔 거리감이 있던 사이도, 멀리서 살다 보면 보고 싶어진다. 

전화 통화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그런 것들.


친구들. 필리핀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지만, 

20년 함께한 친구들과의 관계는 다르다.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 

말하지 않아도 웃는 사이. 그런 관계는 시간이 만드는 것이라서, 

이민 간다고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그리움이 가장 강하게 오는 순간은 대부분 아플 때라고 한다. 

이국땅에서 혼자 몸이 안 좋을 때, 물 한잔 가져다줄 사람 하나 없을 때. 

그때 처음으로 후회가 오는 사람도 있다고. 내가 왜 여기 왔지,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다.

그 그리움을 다 알면서도,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움과 돌아가고 싶음은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떠나온 사람들은 안다.


한국이 그립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엔 

필리핀이 그리울 것이다. 두 곳 모두 자신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 있으면 다른 곳이 그리운 삶. 

그것이 이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그리움 자체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두 곳에 있다는 뜻이니까.


난 필리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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