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정착이야기

4부.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이는 것들 —

세부에 산 지 2년 째 되던 해, 최ㅇㅇ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여기서 영원히 이방인 이겠구나.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아무리 따갈로그어를 배우고, 아무리 현지 음식에 익숙해지고, 

아무리 현지 친구들이 생겨도 — 

그녀는 한국 사람이고, 여기서는 외국인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방인의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문화 충돌의 순간들


필리핀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크고 작은 문화 충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약속 시간. 한국에서는 5분 늦으면 미안하다. 

필리핀에서는 30분 늦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엔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이것은 무례함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문화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떤 전제를 가진 것 인지를.


감정 표현 방식도 다르다. 한국 사람들은 불편한 것을 

직접 말하거나 표정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필리핀 사람들은 불편해도 웃는다. 

처음엔 그 웃음이 다 진심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웃음 뒤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직접 말하지 않는 방식의 의사소통. 

그것을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때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의 가장 신기한 점은,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새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치안. 필리핀에서 살다 보면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조심하게 된다. 

그러다 한국에 잠깐 귀국해서 밤 12시에 혼자 편의점을 걸어가는 순간, 

그 당연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 

한국의 안전함이, 살면서는 몰랐는데 나가보니 보인다.


인프라. 필리핀의 인터넷은 느리고, 정전이 자주 있고, 도로는 막힌다. 

한국의 빠른 인터넷, 안정적인 전기, 잘 닦인 도로가 

얼마나 대단한 것 인지를 필리핀에서 살아봐야 안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겼지만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도 보인다. 

경쟁, 속도, 시선, 비교. 그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아닌지를, 그것이 없는 곳에서 살아보고 나서야 가늠할 수 있다.




현지 친구를 사귄다는 것


필리핀에서 오래 산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험이 있다.

처음엔 한인 커뮤니티에 의존한다. 언어도 통하고, 문화도 비슷하고, 

정보도 얻기 쉽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커뮤니티 안에만 있으면 

한국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필리핀에 왔는데 필리핀을 안 사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현지 친구를 사귀기 시작한다. 처음엔 언어의 장벽이 있다. 

그런데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나라에서 배운다. 서툰 영어로, 때로는 몸짓으로, 

같이 밥 먹고 같이 웃는 것 만으로도 관계가 쌓인다.

그 관계가 쌓이면서, 필리핀이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진짜 삶의 공간이 되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감각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필리핀에서 오래 살아도 완전히 현지인이 될 수는 없다.

언어의 벽이 있고, 문화의 벽이 있고, 외모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친한 현지 친구들이 있어도, 그들이 

세비사노어로 빠르게 이야기할 때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엔 그쪽에서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든다. 

오래 있었더니 한국이 조금 낯설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그 감각. 처음엔 불안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두 문화를 모두 볼 수 있는 자리. 

어느 한쪽에만 속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위치. 

이방인의 자리는 생각보다 넓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난다..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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