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우리는 필리핀에서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정착이야기

3부. 우리는 필리핀에서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 한국에서 짊어지고 온 것들 —

이민 가방을 싸면서, 박ㅇㅇ은 한참을 고민했다.

뭘 가져가야 하는지가 아니었다. 

뭘 두고 가야 하는지였다. 


12년을 살던 아파트의 짐들. 거실 책장에 꽂혀 있는 자기계발서들. 

서랍 안의 명함들. 옷장에 걸린 정장 여섯 벌. 이것들이 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따지다 보니 새벽 두 시가 됐다.

결국 캐리어 두 개만 챙겼다. 나머지는 당근마켓에 올리거나 그냥 버렸다. 

정장 여섯 벌은 버렸다. 마닐라에서 정장 입을 일이 있을까 싶어서. 

명함은 전부 버렸다. 가져가봤자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비행기 안에서 그는 생각했다. 저 많은 것들 중에 진짜 내 것이 뭐였을까.




직함을 내려놓는다


한국에서 \'나\'는 대부분 직함과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명함을 교환하고, 

상대의 직책과 회사를 확인한다. 그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첫 번째 방식이다. 나이를 물어보고,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확인하고, 

그 정보들로 상대방의 위치를 가늠한다.


그 문화 속에서 30~40년을 살다 보면, 직함이 곧 자신이 된다. 

부장이라는 타이틀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필리핀에 오면, 그 직함이 아무 의미가 없다.

현지 사람들에게 당신이 한국에서 어떤 회사의 

무슨 부장이었는지는 관심 밖이다. 

그냥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잘 웃는가, 

함께 있으면 즐거운가, 사람에게 친절한가. 

그것들이 이 사회에서의 평가 기준이다.


처음엔 그 기준이 낯설다. 내 스펙을 어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직함 없이도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조용히 발견한다.




비교를 내려놓는다


한국에서의 삶은 비교로 구성된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집을 샀고, 누구는 승진을 했고, 

누구는 아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 

SNS를 열면 남들의 성취가 쏟아지고, 

그것이 자신의 현재를 초라하게 만든다. 

비교는 공기처럼 늘 거기 있어서, 의식하지 않아도 

매일 흡입하게 된다.


그런데 필리핀에 오면 비교의 기준이 사라진다.

내 주변에 한국 사람이 없거나 적으면, 

비교 대상 자체가 없어진다. 현지 사람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것은 맥락이 너무 달라서 의미가 없다.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보게 된다. 

지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지금 내가 뭘 할 때 즐거운지.

그 질문들이 한국에서는 사치였는데, 여기서는 일상이 된다.




체면을 내려놓는다


한국 사람들이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있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길을 잃으면 당황스럽다.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어쩐지 쪽팔리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길을 잃으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영어로 더듬더듬 물어봐도 상대방은 친절하게 알려준다. 

심지어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험이 작은 것 같지만, 무언가를 바꾼다.


완벽하지 않아도, 모르는 것이 있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그 체면의 무게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리핀의 골목길에서 시작된다.




빠름을 내려놓는다


필리핀에서 한 달 이상 산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변화가 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

처음엔 여전히 빠르게 걷는다. 한국에서의 속도로. 

그런데 주변이 다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혼자 빠른 게 어색해진다. 

서두른다고 뭔가 더 잘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금씩 느려진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면, 보이는 것들이 달라진다. 

골목 담벼락의 그림이 보이고, 처마 밑에 앉아있는 고양이가 보이고, 

저녁 햇살이 야자수 잎에 부딪히는 것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10년을 살아도 못 봤을 것들이, 

여기서는 걷다가 그냥 보인다.


빠름을 내려놓는 것이 뭔가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뭔가를 얻는 것이었다. 

그 역설을, 그 말의 의미를,

필리핀의 어느 느린 골목에서 배운다.


그대여 그리 서두르지 마라 그렇게 급하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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