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김ㅇㅇ은 세부행 비행기를 탔다.
번아웃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서울에서 12년째 광고회사를 다니며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딱히 슬픈 일도 없었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그게 신호였다.
연차 7일을 붙여서 10일짜리 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를 고르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따뜻하고, 싸고, 멀지 않은 곳. 세부였다.
처음 도착한 날 밤
밤 11시, 막탄 세부 국제공항을 나서는 순간 공기가 달랐다.
습하고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서울의 11월은 이미 코트가 필요한 계절이었는데,
여기는 반팔로도 충분했다. 택시 기사가 \"Where you go, sir?\"라고 물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혼자 편의점에 들렀다.
맥주 한 캔을 사서 호텔 수영장 옆 의자에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밤하늘을 봤다. 야자수 사이로 별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수년 만에 처음 보는 별이었다.
그때 뭔가가 풀렸다. 어깨 어딘가에 오래 묶여 있던 것이 조용히 끊어지는 느낌.
나중에 그 순간을 떠올리며 김ㅇㅇ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날 밤이.\"
7일이 10일이 되고
원래 계획은 10일이었다.
그런데 떠나는 날이 다가오면서 이상한 감각이 생겼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직 뭔가가 덜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 덜 됐는지는 몰랐다.
그냥 아직이라는 감각.
항공권 변경 수수료 5만 원을 내고 3일을 더 연장했다.
회사에는 몸이 좀 안 좋다고 했다. 거짓말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신이 안 좋았으니까.
13일째 되는 날, 짐을 싸면서 그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한 달만 살아보면 어떨까.\'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직장이 있고,
월세가 있고, 삶이 서울에 있는데. 지웠는데, 지워지지 않았다.
한 달 살기의 시작
서울로 돌아온 지 두 달 뒤, 김성호는 회사에 한 달 무급휴가를 신청했다.
팀장이 이상한 눈으로 봤다. 동료들이 \"갑자기 왜?\"라고 물었다. 딱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좀 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세부행 편도 항공권을 샀다. 돌아오는 표는 사지 않았다.
한 달 뒤에 사자고 생각했다.
세부에 도착한 첫날, 월세 30만 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수영장이 딸린 콘도였다.
서울 고시원 반값이었다. 오전엔 카페에서 책을 읽고, 오후엔 바다에 갔다.
저녁엔 골목 식당에서 150페소짜리 밥을 먹었다. 한화로 3,500원.
한 달이 끝날 무렵, 그는 돌아오는 항공권을 사지 않았다.
한 달을 더 연장했다. 회사에는 사직서를 냈다.
전화로.
그게 6년 전이다. 지금 김ㅇㅇ은 세부에서 작은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 결정적인 순간
필리핀에 눌러앉은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신기하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거창한 결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고.
어느 날 그냥, 여기가 더 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는 있었는데,
돌아가고 싶다는 감각이 없어진 순간이 왔다고.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바다 앞에 앉아있다가, 어떤 사람은 현지 친구와 밥을 먹다가,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오후에...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그 순간이 오면, 돌이키기가 어렵다는 것.
필리핀은 그런 나라다. 처음엔 그냥 여행이었는데,
어느 순간 여행이 아니게 되는....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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